Editorial/Fashion

<B> 기원을 찾아서 9편: 벤타일 (Ventile)

낙낙이 2017. 10. 12. 16:00

<B>

 

세상에서 가장 귀찮은 일에 들어갈 리스트를 뽑아봤을 때 외출할 때마다 옷을 골라 입는 것이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옷차림을 신경 쓰는 사람이라면 외출 장소, 만나는 사람 등 온갖 요소들을 고려해서 입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귀찮은 일 중 가장 골치 아플 때가 비오는 날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좋은 가죽으로 된 신발이 비에 젖었다가는 하루 종일 신경 쓰이고 마음이 상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옷차림에 신경 쓰는 사람이라면 비오는 날에 입을 수 있는 옷과 신발을 하나씩 장만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비가 오는 날 입는 옷으로 왁스자켓인 바버 비데일 자켓, 벨스타프 트라이얼 마스터 자켓이 있었는데 얼마 전에 이스트로그 벤타일 쉴드 코트를 하나 더 영입했습니다. 벤타일 소재에 대한 설명과 쉴드 코트 후기까지 쓰면 굴아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쉴드코트에 대한 후기와 착샷은 다음에 따로 올리겠습니다!


 

<벤타일 소재로 된 이스트로그 쉴드 코트>

 

 

개인적으로 파카의 끝판왕이라 생각하는 나이젤 카본의 에베레스트도 벤타일 소재인데, 이스트로그 역시 벤타일 소재를 이용한 아우터를 잘 뽑아내는 것 같습니다. 지난 시즌 이스트로그의 겨울철 대표 아우터 중 하나였던 장진호 배틀 파카(Changjin Battle Parka) 역시 벤타일 소재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늘날 고급 아우터의 소재로 쓰이는 벤타일(Ventile) 소재가 어떤 역사를 거쳐 개발된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겨울철 파카의 끝판왕 나이젤 카본의 에베레스트(Nigel Cabourn Everest)>

 

 

 

<벤타일 소재를 이용한 이스트로그의 장진호 파카(Eastlogue Changjin Battle Field Parka)>

 

 

벤타일(Ventile)은 방수기능이 있는 100% 코튼()으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치닫던 1943년에 영국에서 개발되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선박으로 발트해와 북극해를 통해 러시아로 중요 보급품을 호송했는데 독일의 잠수함들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영국의 RAF(Royal Air Force, 영국 공군)가 호송선들을 보호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처칠 수상은 상선을 개조하여 초기 항공모함의 형태를 흉내내어 전투기를 바다에서 띄움으로써 호송선들을 지켜낼 방법을 찾아냅니다. 하지만 이 호송선의 사출기는 거리가 너무 짧아 전투기가 다시 착륙하기에는 무리여서 전투기를 바다에 착륙시키고 파일럿을 구조하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겨울철이라 바다가 매우 차가워서 파일럿이 수중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몇분 밖에 안됐고, 대부분의 파일럿들은 구조되기 전에 사망하기 일쑤였습니다

 

<상선을 개조하여 허리케인 기를 사출하는 모습. 착륙할만한 활주로는 확보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당시에 파일럿이 차가운 바다 위에서 옷이 젖지 않게 하여 생존할 수 있는 시간을 좀 더 벌어줄 수 있는 소재가 급히 필요했습니다. 나일론이 실용화 진행단계에 있었지만 급박한 전쟁 당시 이를 기다릴 여유가 없는 문제가 있던 와중에 영국 맨체스터에 있는 셜리 연구소에서 벤타일(Ventile)이라는 소재를 개발해내었습니다. 아마 면 100%의 소재라 다른 합성섬유의 방수소재들보다 통기성이 좋아 '환기하다'라는 뜻의 'Ventilate'에서 파생된 단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벤타일 소재로 만든 의류 덕분에 파일럿들은 최장 20분까지 물속에서 버틸 수 있었고 물에 빠진 80%의 파일럿들을 구조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영국 공군(RAF)와 나토(NATO)군은 이러한 벤타일 소재로 된 수트를 아직도 종종 입는다고 합니다여담으로 영화 덩케르크(Dunkirk)에서 다루는 덩케르크 후퇴 작전은 1940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벤타일 소재의 옷을 입지는 못했습니다.

 

<벤타일 소재의 수트를 입은 호커 허리케인(Hawker Hurricane)기의 파일럿들>

 

 

<영화 덩케르크(Dunkirk)에 등장하는 스핏파이어의 파일럿>



그러나 벤타일은 이집트산 장섬유[Extra-long-staple(ELS)]로 제작되는 고밀도 직물이어서 값이 비쌌기 때문에 전쟁 이후 값싸게 생산되어 대중에 유통된 나일론에 밀리게 됩니다. 하지만 나일론은 합성섬유 특성 상 감촉이 좋지 못하고 마찰에 의한 소음이 발생하며 땀을 흡수하지 못하여 생기는 불쾌함 때문에 벤타일 같은 고급 소재가 다시금 받게 된 것 같습니다

 

 

<벤타일 패브릭을 사용한 나이젤 카번의 아우터>

 

 

벤타일이 코튼() 100%임에도 화학섬유 못지 않은 방수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코튼()은 기본적으로 자체 무게의 65%를 흡수해도 머금을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매우 가는 실을 고밀도로 직물을 짜면 실과 실 사이의 틈을 습기를 흡수하고 팽창한 섬유가 물을 막아 방수 기능을 하게 됩니다. 벤타일은 그중 전체 면 생산량 중 2%long staple fabric을 사용하여 기존의 코튼()보다 3~40% 밀도를 높여 방수효과가 훨씬 뛰어난 것입니다. 벤타일은 아웃도어 웨어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고어텍스(Gore-tex)와 방수능력이 비슷하고 통기성은 더 뛰어나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코튼()이기 때문에 표면 대비 60% 이상 물을 접촉하게 되면 무게가 늘어나 방수능력이 떨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즉 물을 냅다 들이 붓거나 거센 비에 장시간 노출될수록 효과가 떨어지며 일반 코튼()에 비해 건조시간이 더 길다고 합니다. 하지만 벤타일은 100% 코튼()이기 때문에 합성섬유가 갖고 있는 감촉, 마찰음, 통기성 등의 단점들을 커버하는 장점이 있는 것이죠.

 

<코튼(면) 100%로 화학섬유의 단점을 커버하는 벤타일 패브릭>

 

 

<벤타일 소재를 쓰는 스톤 아일랜드(Stone Island)>

 

하지만 영국에서는 더 이상 생산하지 않고, etaProof 원단을 생산하는 스위스의 스토브(Stotz) ()에서만 생산 공급한다고 합니다. 다음 이스트로그 벤타일 쉴드코트 후기·착샷 글에서 언급하겠지만 벤타일은 면 100%의 소재이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일반 면 소재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뭐하러 그 비싼 벤타일 소재를 쓰냐' 싶을 수 있는데 벤타일 소재는 일반 면처럼 에이징(aging) 되는 멋도 있으면서 방수기능까지 갖추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만...)


벤타일(Ventile) 소재는 사실 생소한 주제라 원래 이스트로그 벤타일 쉴드 코트의 후기를 위해 써둔 것이었는데, 벤타일 소재의 역사가 생각보다 재밌어서 글을 분리하게 되었습니다. 조만간 이스트로그 벤타일 쉴드코트에 대한 저의 느낌도 올려보겠습니다!

이스트로그의 장진호 파카

이스트로그의 펀데일 파카

나이젤카본의 에어크래프트 자켓

나이젤카본의 아노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