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ial/Culture

<K> 연극 "블랙버드" - 조재현, 채수빈

낙낙이 2016. 11. 1. 23:50

[연극 블랙버드]

from 수현재컴퍼니


  참 오랜만에 연극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연극을 엄청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이 작품에 대한 정보도 별로 없었고, 오히려 조금 별로였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직접 보았을 때, 꽤나 좋은 작품이었다고 느껴졌고 계속 머릿속에서 작품에 대한 생각들이 빙빙 돌고 있습니다. 가볍게 지나칠 수만은 없는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작품에 대한 소개를 하자면, 이 작품은 에딘버러 국제페스티벌 공식 개막작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극작가 데이비드 해로우어(David Harrower)의 작품으로 등장하자마자 영국 연극계를 휩쓸었습니다. 단순히 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영국 비평가상에서 베스트 희곡상을, 로렌스 올리비에상에서는 베스트 희곡상을 수상하는 등 수많은 수상으로 작품성을 입증했고, 전세계에서 공연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8년에 추상미, 최정우 주연으로 올라갔었고, 최근에는 브로드웨이에서도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브로드웨이 공연에서는 제프 다니엘스와 미셸 윌리엄스의 캐스팅으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이 연극의 시작은 신문기사의 한 조각이었습니다. 해로우어는 신문에 실렸던 아동성애 사건을 보고 모티프를 얻어 작품을 썼습니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15년전, 아동성애 사건으로 복역을 한 후, 피터로 이름을 바꾼 채 새 삶을 살아가는 레이 앞에 15년 전 12살 소녀였던 우나가 갑자기 등장하게 됩니다. 이제는 20대가 되어버린 우나는 레이에게 15년 전 있었던 일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며 그 당시의 기억을 되살리지만 이 둘의 기억은 어딘가 조금씩 엇나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둘은 종잡을 수 없는 감정 속에 빠져버리고 그 당시의 사건을 하나씩 반추하게 됩니다. 이 연극은 이렇게 레이와 우나, 두 인물만 등장하는 2인극입니다. 90분을 오직 두 명의 배우의 힘으로만 이끌어가야했기에 끊기지 않는 감정선의 유지와 극을 이끌고가는 흡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학로의 대표적인 연출가인 문삼화의 연출과 선이 굵은 조재현의 만남으로 약간은 기대되었으나 오늘의 우나였던 채수빈은 아직 연극 경험도 많지 않고 기존의 이미지와는 좀 다른 캐릭터라서 잘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극이 끝나고 난 뒤엔 채수빈이 더 기억에 남을 정도로 좋은 공연이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2인극이라 두 배우의 호흡과 연기력이 이 연극의 핵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조재현 씨의 연기는 좋았습니다. 원래 기대치가 높았던 지라 더 좋은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역시 괜찮았습니다. 선이 굵고 힘을 주어야 할 때 확실히 주는 연기였습니다. 중간중간 애드립도 간간이 재밌었는데, 무거운 주제의 연극이라서 그런 애드립이 저에겐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기는 했습니다만 과도하게 경직되어가는 분위기를 풀어주기엔 좋았습니다. 본인의 대사가 아닌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리액션과 움직임도 확실히 인상적이었습니다.


from 수현재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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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반해 채수빈의 연기는 정말 새로웠습니다. 기대 자체가 전무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보았는데 생각 외로 안정된 연기였습니다. 톤도 좋았고 감정도 흐트러짐 없이 좋았습니다. 자신의 분노로 레이에 대한 비난을 쏟아낼 때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15년 전 섬에서 있었던 레이와의 일을 혼자 기억하며 늘어놓을 때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눈과 입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특히 놀라웠던 건 27살의 우나의 모습이지만, 12살의 우나도 같이 느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드는 건 그녀의 앳된 얼굴뿐만 아니라(실제로 23살입니다) 자그마한 행동 하나 하나에 15년 전의 느낌을 담아내서 였을 것입니다. 덕분에 극에 더 몰입하여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차가운 눈빛으로 세상에 대한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우나는 그녀의 깊은 눈과 깡마른 체구에 너무나도 어울렸습니다. "청순을 벗고 매혹을 입다"라는 홍보문구는 어색하지만 기존의 밝고 청순했던 이미지를 완전히 깨고 연기자로서의 강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됩니다. 앞으로의 연기가 더욱 기대됩니다. 

  곧 있으면, 이 연극으로 영화도 만든다고 합니다. 소아성애 사건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앵무새 죽이기"와 "라쇼몽"을 계속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이 둘과는 달리 자신만의 매력이 분명한 작품임은 틀림없습니다. 두 배우의 연기 속에서 피어나는 서늘한 감정과 분노의 색은 꼭 한 번 느껴보았으면 합니다.  연극이 가지는 매력을 유감없이 발산하는 이 작품은 아직 대학로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 가서 보시면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15년 전의 이야기지만 그 15년은 아직도 흐르고 있고, 두 사람은 지금도 그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K>